내가 '착실하게 달린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서 말한다면, 일주일에 60킬로를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0킬로를 달린다는 것이다. 사실은 일주일에 7일, 매일 10킬로를 달리면 좋겠지만, 비가 오는 날도 있고, 일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리 일주일에 하루쯤은 '쉬는 날'을 정해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60킬로, 한달에 대충 260킬로라는 숫자가, 나에게는 '착실하게 달린다'고 하는 일단의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 -21쪽
한달에 260킬로가 '열심히 달린' 것이라고 한다면, 310킬로는 '성실하게 달린' 것이 될 터이다. 달리는 거리가 늘어감에 따라 체중도 줄어갔다. 2개월 반 만에 7파운드가 줄고, 배 둘레에 조금씩 붙기 시작한 군살도 빠졌다. 7파운드라고 하면 3킬로그램 정도 된다. 정육점에 가서 3킬로그램의 고기를 사서 손에 들고 집까지 걸어 돌아오는 걸 상상해보기 바란다. 아마도 그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의 무게를 몸에 붙이고 살아왔구나, 하고 생각하면 꽤 복잡한 기분이 든다. -34쪽
달릴 때에는 대체로 록 음악을 듣는다. 때로는 재즈를 듣는 일도 있다. 그렇지만 달리는 리듬에 맞추는 걸 생각할 때, 역시 반주 음악으로서는 록이 가장 좋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레드 핫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나 고릴라즈(Gorillaz)라든가, 제프 벡(Jeff Beck)이라든가 또는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dence Clearwater Revival),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 같은 오래된 음악. 되도록 심플한 리듬의 음악이 좋다. -33쪽
달리고 있을 때 어떤 일을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중략)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36쪽
어쨌든 나는 다시 한 번 '달리는 생활'을 되찾았다. 꽤 '착실하게' 달리기 시작해서, 이제는 제법 '진지하게' 달리고 있다. (중략) 운동화를 신고, 얼굴과 목덜미에 선탠 크림을 듬뿍 바르고, 시계를 맞추고 나서,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한다. 무역풍을 정면으로 얼굴에 받으며,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허공을 질러 가는 백로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그리운 러빙 스푼풀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서. -43쪽
달리기 시작하고 한동안은 그다지 긴 거리를 달릴 수는 없었다. 20분이나 기껏해야 30분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도 헉헉 하면서 숨이 차버리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랫동안 운동다운 운동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중략) 그러나 계속해서 달리는 사이에 달리는 것을 몸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에 따라 거리도 조금씩 늘어갔다. 폼 같은 것도 갖춰지고 호흡의 리듬도 안정되고 맥박도 차분해져 갔다. 스피드나 거리는 개의치 않고 되도록 쉬지 않고 매일 달리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게 달린다는 행위가 하루 세끼 식사나 수면이나 집안일이나 쓰는 일과 같이 생활 사이클 속에 흡수되어 갔다. 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습관이 되고, 쑥스러움 같은 것도 엷어져 갔다. 스포츠 전문점에 가서 목적에 맞는 제대로 된 신발과 달리기 편한 옷도 사왔다. 스톱워치도 구입하고, 달리기 초보자를 위한 책도 사서 읽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러너가 되어 간다. -68쪽
나는 '오늘은 달리고 싶지 않은데'하고 생각했을 때는 항상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너는 일단 소설가로서 생활하고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시간에 집에서 혼자서 일을 할 수 있으니, 만원 전철에 흔들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통근할 필요도 없고 따분한 회의에 참석할 필요도 없다. 그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 일에 비하면 근처를 1시간 달리는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지 않는가? (중략) '그렇고 말고.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거야' 하고 생각하게 된다. -76쪽
찰스강가를 1시간쯤 달리면, 마치 양동이로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입고 있는 모든 것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버린다. 햇볕에 탄 살갗이 따끔거린다. 머리가 멍해진다. 정리된 생각은 어느 한 가지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참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몸의 중심에서 모든 걸 깡그리 쥐어짜내 버린 것 같은,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우러난다. -22쪽
나는 다시 열심히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가슴으로 들이마시며, 오랫동안 달려 익숙해진 지면을 박차고 달리는 기쁨이 생활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운동화 소리와 호흡 소리와 심장의 고동이 뒤엉켜, 독특한 폴리 리듬(연주하는 한 곡 안에서 두드러지게 대조적인 리듬을 동시에 연주하는 방법)을 만들어 나간다. -32쪽
거리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아마추어냐 프로냐 하는 것은 바로 구별할 수 있다. 헉헉, 하면서 짧은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것은 초보자이고, 조용히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베테랑이다. 그들의 심장은 천천히, 생각에 잠기면서 시간을 새겨 나간다. -131쪽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중략) 무심한 여름 구름이 보일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구름은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이 보일까? 아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 - 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 -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229쪽
가령 몇살이 되어도 살아 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발가벗고 거울 앞에 아무리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 있는다 해도 인간의 속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다. -246쪽
하루키도 처음에는 잘 달리지 못했다. 하지만 꽤 착실하게 달리기 시작해서 지금은 제법 진지한 자세로 달린다. 보통 하루에 10킬로를 달린다. 그렇게 매일 한 시간쯤 달리다보면 모든 걸 털어낸 듯한 상쾌함이 든다. 이제 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습관 중 하나다. 달릴 때에는 대체로 심플한 리듬의 록 음악을 듣고, 달리면서는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참고로, 관련 연구에 따르면 러닝을 하면서 발생하는 반복적인 상하 운동이 마치 명상과도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한다). 조용히 규칙적으로 호흡을 하며, 내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릴 뿐이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해나간다.
2) 하루키의 '부상'에 대한 단상
우리가 꾸준히 운동을 함에 있어 가장 큰 적 중 하나는 '부상'이다. 하루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책 속에서 스스로 겪은 '부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굉장히 위트있다.
무릎이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문제의 태반이 그렇듯이 이 통증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돌연히 찾아왔다. (중략) 아마 힘들게 연습을 반복했던 기간의 피로가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표면에 얼굴을 내놓은 것이리라. (중략) 매일매일의 힘든 연습을 벗으로 삼는 장거리 주자에게 있어서 무릎은 항상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부위다. 달리고 있으면 착지할 때마다 체중의 세 배가 되는 충격이 발에 가해진다고 한다. 그것이 하루에 1만 번 가깝게 되풀이되는 것이다. 딱딱한 콘크리트 노면과 가공할 만한 하중의 증가 사이에서 무릎은 침묵을 지키며 참고 있다. (중략) 무릎이라는 것도 때로는 불평을 하고 싶을 것이다. 194~196쪽
그렇게 노력했는데, 어떻게 경련 같은 것에 당해버린 것일까? 모든 노력은 정당하게 대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라는 것을 새삼 강조할 마음은 물론 아니지만, 만약 하늘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징표를 조금이라도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 그 정도의 친절함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224쪽
신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본전도 못 건지게 된다. -128쪽
나도 작년 1월에 책 <미라클 모닝>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앞 한강변을 달린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니까 정말 책의 내용처럼 너무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런 아침 러닝 생활도 3일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다름아닌 부상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3일째 아침 달리던 중, 갑자기 오른쪽 오금 쪽에 무리가 왔음을 느꼈고, 그 때 이후로 두달 이상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전전하며 고생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런 부상을 당한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우선 달린다는 사실에 너무 신난 나머지 달리기 전에 스트레칭을 거의 제대로 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 몸도 제대로 풀지 않고 몇 킬로를 달렸으니 하루키 말대로 오금 쪽의 근육이 참다 못해 불평을 터뜨린 것이다. 둘째로 처음부터 거리 욕심을 내서 달리기 초짜가 겁도 없이 5킬로를 35분 내로 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욕심이 앞서 한계를 넘어서는 목표를 세웠고, 결국 나는 2달간 쩔뚝 거리며 본전도 못 건지게 되었던 것이다.
3) 하루키가 말하는 러너스 블루(Runner's Blue)
꾸준함이 가장 중요한 운동.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한번쯤 권태를 느낄 수 있다. 하루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하루키는 이를 '러너스 불루(runner's blue)라 이름 붙였다.
나와 '달리는 일' 사이에는 그처럼 서서히 권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지불한 만큼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실망감이 있었고, 열려 있어야 할 문이 어느 사이에 닫혀버린 듯한 폐쇄감이 있었다. 그것을 나는 '러너스 블루'라고 이름 붙였다. -29쪽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나름의 자신감도 생겨났다. 달리기를 잘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후유증'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있었다. 그 뒤 장기간에 걸쳐 나는 장거리 러너로서의 슬럼프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략) 나는 흥미의 중심을 마라톤 풀코스에서 트라이 애슬론에 대한 도전으로 옮겨, 다시 체육관에 다니면서 열심히 스쿼시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생활 스타일도 조금씩 변화해갔다. 달리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 초기에 억지가 심한 열정을 쏟다가 식어버린 연애를 대하는 것처럼.
(중략) 그리고 지금, 무척 길게 지속된 '러너스 블루'의 안개를 나는 가까스로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중략) 어떻게 해서 그러한 활달한 기분을 다시 품게 되었는가, 지금은 아직 차근차근 조리있게 설명할 수 없다. (중략) 무심하게 달리기를 즐기던 나날의 기억이 그리운 정경과 함께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어떤 종류의 피하기 어려운 조정이 진행되고 있어, 그 때문에 필요로 했던 기간이 드디어 끝났다, 라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중략)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와 경위로서 '러너스 블루'가 내 몸에 배어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와 경위로서 지금 그것이 희미해지고 사라지려 하고 있는지. 그 설명은 아직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어쩌면 결국에는 이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 라고.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송두리째, 이유도 모른 채 그 어떤 경위에도 아랑곳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고. 세금이나 조수의 간만, 존 레논의 죽음과 월드컵의 오심과 마찬가지로. -183~186쪽
하루키는 러너스 블루, 즉 달리기에 대한 애정이 식는 슬럼프 시기를 맞았다. 결국 흥미를 트라이 애슬론, 스쿼트 등으로 옮겼고, 그렇게 한 동안 달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길게 지속되었던 '러너스 블루'를 지나 다시 활달한 기분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어떠한 이유와 경위로서 '러너스 블루'가 몸에 배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와 경위로서 그것이 희미해지고 사라지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결국에는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이유도 모른 채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받아들일 뿐이다.